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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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은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의 제4대 차르였던 표트르 대제가 1721년에 제정을 선포한 이후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해서 군주제가 붕괴될 때까지 197년간 존속했던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표트르 대제 이전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까지, 또는 루스 차르국의 성립 시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러시아 제국으로 보기도 한다. 제정시대의 러시아와 이후 소련의 구성 공화국인 러시아 SFSR를 구분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
대영제국,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인류 역사상 3번째로 면적이 넓은 국가였다.
2. 역사
2.1. 제국 건국 이전
2.1.1. 모스크바 대공국(1284–1547)
제정의 시초는 키예프 대공국(882 ~ 1283)의 일파인 모스크바 대공국(1283 ~ 1547)에서 시작된다. 15세기 이반 3세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인근에 널려있던 수많은 소국들을 통합하여 연합체적인 모습으로 러시아를 키워나갔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황실 종친, 소피아 팔레올로기나[2] 와 혼인하고 쌍두독수리 문장을 국가휘장으로 사용하면서 러시아가 제3의 로마 임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2.1.2. 루스 차르국(1530–1721)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이반 3세의 뒤를 이은 이반 뇌제는 기존의 대공이라는 명칭 대신 차르(짜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나름대로 통합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중앙집권적인 루스 차르국이 성립되었다.
이반 4세가 죽은 후 러시아내부는 혼란 시대라고 불리는 동란의 시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러시아에는 자신을 차르라 주장하는 이가 여러 명 등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와 스웨덴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침범하면서 혼란이 가중된다. 이러한 동란시대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귀족회의를 통해 로마노프 왕조를 열면서 끝나게 된다. 비록 류리크 가문은 사라졌으나 그 가문과 결혼한 사이였다는 이유로 로마노프 왕조가 생길 정도로 류리크 왕조가 만든 차르 전제정권은 강력했다. 귀족회의를 통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차르의 권위는 여전했으며, 오히려 귀족들이 동란시대를 통해 세가 약해지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다시 긴 기간 동안 강력한 전제정치를 이어가게 된다.
2.1.2.1. 보리스 고두노프 치세(1598–1605)
모스크바는 이반의 살아 남은 외아들과 결혼한 여자의 오빠인 보리스 고두노프(재위기간: 1598–1605)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의 치세는 스웨덴과 싸워 이긴 짧은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는 태평시대였으며, 근대화와 표준화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미해결로 남았으며 특히 대귀족의 불만과 반대는 해소되지 않았다.
2.1.2.2. 계승전쟁(1606–1613)
대공위 계승권자임을 주장하는 첫 번째의 이른바 '가짜 드미트리'가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가짜 드미트리의 지원군은 쉽사리 격퇴당했지만 고두노프도 몇 주 후에 죽고, 대귀족들이 고두노프 가문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드미트리를 차르로 추대했다. 이어 '혼란 시대'(1606~13)가 뒤따랐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중심부는 혼란에 빠지고, 드미트리가 끝내 피살당했으며, 2번째의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났고, 폴란드가 침략해 왔다.
2.1.2.3. 로마노프 왕조(1613–1917)
모스크바의 세력집단들은 폴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결집했으며 1613년에 류리크 왕조의 외척인 미하일 로마노프(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를 차르로 선출했다. 이때부터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위상은 낮았고 서구는 로마노프가를 러시아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노프 왕조가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고 경제와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정치적 회복은 중앙정부 관료들의 존속과 국정을 맡은 소수 독재자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후에 이루어진 발전은 17세기 이들 집단의 성장과 통합, 그리고 순조로운 세력 확장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혼란시대 말엽에는 대귀족(보야르)과 전문 행정가가 관료의 기능을 맡았으나 그후 100년도 안 되어 모든 상인계층·귀족계층·성직자들이 도처의 관료직을 차지했다. 중앙기관의 세력이 다른 모든 정치·사회 집단을 압도하며 쉽사리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방기관이 취약하고 독립된 교회나 사회적 권력이 없었던 데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1649년의 대법전에 반영되었고 이 법전이 1833년까지 러시아 법의 기초가 되었다. 이 법전은 교회를 국가의 관할하에 두고 농노제를 법제화했으며, 군주에 대항하는 '언행'죄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정치적으로 17세기에는 폴란드와 수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동(東)우크라이나를 병합했다.
한편 1650년대에는 총대주교 니콘이 전례를 간소화하고 그리스어 원전과는 너무 달라진 교회 서적을 바로잡았으며, 성직자의 사목기능을 강조하는 등 종교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자 러시아 정교회 내에 분열이 생겼으며, 각 교파와 지역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정부는 개혁가 편에 서서 '복고신앙파'를 억압했다.
(이반 뇌제–표트르 대제 시기의 자세한 역사는 루스 차르국 문서 참조.)
2.2. 제정 러시아(1721–1917)
2.2.1. 열강의 반열 진입
키예프 루시 당시에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잘나갔던 러시아는, 이후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초토화와, 종교 및 외교적으로 친밀한 관계였던 당대의 선진국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문화의 발전이 정체되었다. 동로마의 멸망 이후 러시아는 동방 정교회 문화권의 마지막 보루 신세가 된 반면 당시 발전하던 서유럽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일색이었던 것도 서유럽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제한 상황을 만들었다.
또한 모스크바 러시아가 이반 3세와 4세 시절 성장한 직후 일어난 동란시대로 러시아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큰 위기를 겪었다. 이렇게 여러가지가 맞물려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될 무렵의 러시아는 이웃국가들에 비해 국가 발전이 상당히 미흡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대제의 적극적인 서구화 및 북방전쟁의 승전으로 인한 영토확장으로 겨우 '열강클럽'에 끼어들면서 바뀌게 된다.
2.2.1.1. 표트르 대제의 개혁
표트르 1세의 즉위는 향후 2세기 동안 러시아를 지배하게 될 사회적·제도적·지적 동향을 예고하고 확립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소년 시절 모스크바에 살던 서유럽인들과 아주 가까이 지냈던 표트르 1세는, 반 정도는 아시아 국가라 해도 좋았던 러시아를 서구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구화 정책을 통해 급격하게 러시아를 서유럽화 시키기 위해 힘쓰는 한편, '임페라토르(Император)'를 러시아 군주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하여 절대왕정의 기틀을 다졌다. 엄밀한 의미에서 '러시아 제국'이라고 하면 이 시기부터를 의미한다.
표트르 대제는 귀족(보야르)들에게 서유럽인들처럼 수염을 깎고, 서유럽식 의복을 입고 댄스와 파티에 참석하며 커피 마시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는 한 세대 남짓 만에 러시아의 교육받은 귀족을 유럽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본격적으로 러시아의 교육과 문화생활에서 새 시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처음으로 세속 교육을 대폭 도입하여 모든 국가공무원에게 의무적으로 교육받도록 했다.
표트르 1세 치하에서 대북방전쟁의 승전으로 스웨덴 제국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향력을 일소한다.
이 시기에 러시아에는 두 가지 행운이 겹쳤다.
2.2.1.1.1. 유럽 군사력의 안정기
첫 번째 행운은 유럽의 군사력이 급격한 변혁기를 일단락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기술을 외부에서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유럽의 군사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거대 국가로서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으므로 빠른 속도로 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2.2.1.1.2. 중동부 유럽 지역 힘의 공백
두 번째 행운은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할 세력이 부재했다는 것인데, 이 전에 강성하던 폴란드는 크게 쇠약해져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남으로는 오스만제국과, 서로는 프랑스와 치열한 항쟁을 거듭했으며 훗날의 강대국인 프로이센은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러시아가 스웨덴을 격파하고 동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견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한 나라가 강성해지면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연합해서 끌어내리는 것이 역사의 기본 패턴인 유럽에서 정말로 드문 현상이었다.[3]
2.2.1.2. 거대제국의 탄생과 팽창
덕분에 러시아는 주변의 여러 지역들을 잇달아 병합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팽창할 수 있었다. 군사 기술이 향상되자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정복과 진출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1773년과 1795년에는 폴란드 분할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했고, 1783년에는 크림 칸국을 병합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도 공세를 시작해서 1792년에는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드네스트르 강에 이르렀다. 북으로는 1790년에 스웨덴을 격파하고 핀란드로 진출했다. 1799년에는 베링 해를 건너 아메리카 식민지를 경영하였고,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페르시아 북부를 차지하였다. 이후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위구르와 몽골에 영향력을 미쳤고,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얻으면서 만주까지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활동으로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프로이센도 영국도 아닌 러시아였던 셈이다.
2.2.2. 팽창의 제동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을 지나, 알렉산드르 1세 시절인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의 주력을 괴멸시키고 프랑스군을 꺾은 러시아는 마침내 서방국가들로부터 강대국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유럽을 평정하게 되면서 이제서야 다사다난했던 러시아도 숨통이 좀 트이는가 싶었지만 현실은 시궁창.
러시아 제국의 실체는 속빈 강정에 불과했다. 제국 인구의 대부분(80~90%)이 문맹에 가난한 농노 상태였던 데다가 심지어 이 농노제가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러시아 귀족들은 재판권과 경찰권을 가지고 있어 농노들을 내키는 대로 처벌할 수 있었다. 물론 차르가 귀족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그 차르부터가 농노를 억압하니 잘 될 턱이 없었다. 게다가 국가의 모든 권력이 전제군주인 차르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자본주의의 활성화, 중산층의 대두, 과학혁명과 같은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표트르 1세가 이룩한 개혁은 단기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근본적인 시책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봉건적, 권위주의적인 사회구조를 개선할 생각을 안했기에 오히려 이게 강화되는 결과만 초래했고, 러시아 제국은 변화하는 유럽 역사의 일반적인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고 훗날 자멸하는 데 일조하였다.
결국 나폴레옹 전쟁의 상처를 빈 체제로 유럽 각국들이 씻어내자마자 러시아의 존재감은 병풍 수준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2.2.2.1. 나폴레옹과의 전투(1812)
이후 러시아의 팽창에 제동이 걸린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들어서였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의 군사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러시아의 확장은 일단 저지되었다.
그러나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수십만 대군을 털리고 알거지가 되는 바람에 마침내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최강국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프랑스가 균형을 잡아주지 않으면 러시아가 그 앞잡이인 프로이센(적어도 메테르니히의 생각으로는 그랬다)을 앞세워서 독일 지역과 유럽의 패권을 장악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는 무패였던 프랑스군을 최초로 대파한 러시아의 군사력에 유럽국가들의 과장된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다.[4]
이는 빈 체제에서 프랑스를 짓밟지 않고 오히려 프랑스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 덕에 프랑스가 복수를 부르짖으며 난동을 피우지 않았다.[5] 100년 뒤의 조약과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2.2.2.2.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1813–1907)
2.2.2.2.1. 직접적인 견제
식민지 팽창과 부동항 확보도 시원찮아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끈질긴 견제 앞에 맥을 못추고 비틀거렸다.
- 크림 전쟁(제 1차 동방전쟁 1853 ~ 1856)에서 영국이 패전을 거듭하던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여 발칸반도와 마르마라 해지역까지 노리던 러시아를 공격하였다. 영국의 개입으로 크림 반도까지 함락당하는 수모를 격게되었고 1856년 파리조약으로 인해 크림반도와 발칸반도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크림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까지 미국에 매각해야 했다.
- 러시아-튀르크 전쟁(제 2차 동방전쟁 1877 ~ 1878)의 승전으로 발칸 반도에 영토와 슬라브 계열의 위성국을 확보하는 산 스테파노 조약를 체결했지만 영국의 개입으로 열린 베를린 회의를 통해 무위로 돌아갔다.
-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 ~ 1842)도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 이후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러시아 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크림 반도를 통해 러시아를 공격하고 했으나 독일 제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래서 대신 이뤄진 것이 거문도 점령이었다.
- 거문도 사건(1885)을 보면, 머나먼 동쪽의 조선에서도 영국의 직접 견제가 이루어졌을 정도라는 걸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양 진출이 영국과의 대치로 막히자 러시아는 위구르,몽골,만주 등 중국 북부에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한반도와 쿠릴열도, 홋카이도까지 넘보았다. 러시아가 중국 북부를 넘보자 영국은 티베트를 침공하여 러시아의 중국진출을 견제했으며, 아편전쟁이후 영국은 홍콩을, 러시아는 연해주를 할양받는 등 영국은 해안지역과 장강을 비롯한 중국 남부에, 러시아는 중국 북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대한제국 조정에 절영도조차를 요구하면서 한반도를 통한 남하정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였고, 러시아는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의 섬들을 점령하며 영국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중국,일본뿐만 아니라 영국까지 동아시아에서 견제해야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러시아는 한반도의 섬들에서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한다.
2.2.2.2.2.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견제
영국의 대러견제는 거문도 이후로
- 영일동맹(1902)을 체결했다. 영국은 그 전까지 유럽국가들과 '동맹'이 아닌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수립했다. 비스마르크가 3제 동맹을 이끌어냈을때 영국은 독일과 '협상'으로 우호관계를 맺었고, 1차 세계대전도 프랑스,러시아와 동맹이 아닌 협상국을 형성했다. 이처럼 다른 국가와 거리를 두었던 영국이 아시아의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것은 그만큼 러시아의 팽창을 전방위적으로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점차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일본은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러시아와 분할하고자 하였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영일동맹과 미일관계의 증진으로 러시아는 일본에 39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할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일본이 무시하였고,
- 러일전쟁(1904 ~ 1905)이 발발하였다. 영국이 동맹국인 일본을 지원하면서 일본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러시아는 발트해의 발트 함대를 투입하지만, 영국의 개입으로 발트 함대가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과 전투를 치루어야 했다. 결국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상실하였고, 이후 한일합방이 이뤄진다.
2.2.3. 러시아 제국 후기
2.2.3.1. 크림 전쟁(1853–1856)의 패배
당대 최강 무능장교들의 집합이었던 크림 전쟁에서도 한 수 위의 무능함을 자랑하면서 연합군에게 패하여 러시아의 후진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2.2.3.2. 러일전쟁(1904–1905)의 패배
그러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제국에게 패배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실질적인 손익을 무시하고 당시에 만연한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 그래도 '백인 국가'인 러시아가 '황인 국가' 일본에 패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거기다가 이 패배로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수많은 이권을 잃어버리고 남사할린을 일본에게 떼어 주고 한반도도 사실상 일본에 넘겨줬다.
2.2.3.3. 대튀르크 전
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펄펄 나는 상대가 있었으니 그것은 한창 막장 테크를 열심히 타던 오스만 제국이었다. 거의 틈만 나면 오스만 제국을 털어먹는 탓에 다른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을 살려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2.2.4. 러시아 제국의 멸망
특히 1900년대에는 세율 90%라는 고세율과 지배층의 사치와 무능으로 러시아 민중들 고통은 심화되었으며 이러한 민중들의 불만에 제국은 피의 일요일 사건 같은 억압책만 고집하면서 러시아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무리하게 참전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 제국군이 간신히 대포 1발을 발사하면 독일 제국군은 10발 넘게 발사하는 등 한심한 국력으로 참패의 연속을 겪고 말았다.
2.2.4.1. 제1차 세계대전: 계속되는 전투에서의 패배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러시아군은 막장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는 비교적 잘 싸웠지만 정작 동맹국 의 주력인 독일군에는 압도적인 병력을 밀어붙이고도 처참하게 관광을 다니며 밀리기에 바빴다.
2.2.4.2. 러시아 혁명
인민들은 오랜 전쟁에 지치다 못해 분노해 2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러시아 임시정부)이 잠깐 생겼지만, 전쟁을 계속하는 바람에 오래가지는 못하였고 다시 10월 혁명이 터져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국가(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독일을 이길 수는 없었고 결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엄청난 영토를 내주는 등 사실상의 패배로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2.2.4.3. 러시아 내전
혼란 속에 러시아 제국 아래 있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은 독립하고자 했고, 국내 반공세력과 외세도 첫 공산주의 국가를 두려워해 혁명을 저지하고자 무력 간섭(백군)을 벌여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이 터졌다. 이 때 러시아 제국 영토 내에 젤레나 우크라이나,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쿠반 인민 공화국 같은 여러 미승인국들이 생겨나고 소멸하였다. 백군은 초기 단결하지 못하고 1918년 말에서야 러시아국을 조직해 하나로 뭉치지만, 결국에는 적군이 승리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뜯긴 영토를 일부 회복하였으며, 이들을 구성국으로 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건국한다.
3. 영토
국토가 매우 거대했는데, 당시 시대만 해도 영연방 대영제국 다음으로 크고 아름다운 동구권의 국가였다. 그리고 이때가 '''러시아 역사상 영토가 가장 컸을 때'''[6] 인데, 19세기 전반~20세기 전반에는 영국에 밀려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가 아니었지만[7] 이보다 영토가 '''훨씬''' 작아진 지금의 러시아는 다른 열강이 식민지를 거의 다 잃은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큰 나라다.[8] (위 사진의 녹색 부분. 연두색 부분은 간접적으로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거나 잠시동안 점령된 곳이다. 단 조금 조심해서 봐야하는 게 러시아 제국이 진한 녹색으로 칠해진 부분을 동시에 점령한 적은 없다. 중앙아시아 점령은 알래스카 매각 이후에 이루어졌다.) 3개 대륙(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에 영토를 가지고 있던 나라였다.
러시아가 북아메리카에서 알래스카만 차지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러시아는 여기서 더 남하해서 오늘날 캐나다의 밴쿠버 지역과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영유권을 두고 영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19세기 초에는 '''캘리포니아 북부까지 남하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5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로스 요새(Форт-Росс, Fort Ross)'를 짓기도 하였다.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의 북쪽 경계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기에, 스페인에서는 자기 식민지 근처까지 내려온 러시아인들을 보고 기겁했다. 로스 요새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주 수출품인 모피의 감소로 1848년에 폐쇄되었다. 맨 위의 지도를 확대해서 보면 알래스카뿐 아니라 오늘날 캐나다 영토의 일부도 녹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미국 본토인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주 북쪽에도 녹색 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하와이 일부 섬까지 진출해서''' 요새를 쌓기도 하여 하와이 원주민들이 러시아에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9] 아프리카 지부티의 사갈로라는 항구도시에도 '신 모스크바(Новая Москва)'로 명명하여 1889년 1월부터 2월까지 약 1개월동안 식민지를 세운 적이 있다! 다만 둘 다 극히 짧은 기간이었기에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제외된다. (#, #)
4. 인구와 민족
1898년부터 1905년까지 장장 7년여 간 이루어진 러시아 제국의 인구는 다음과 같았다. 다만 당시에는 아직 현대와 같은 공교육에 의한 민족 정체성 확립이 나타나기 전이었으므로, 당시 민족 구분은 주로 언어와 종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종교 신도수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5. 군사
- 러시아 제국군(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 러시아 제국 친위대(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а́торская гвардия)
- 러시아 제국 육군(РИА)
- 척탄병 군단(Гренадерский корпус)
- 독립헌병 군단(Отдельный корпус жандармов)
- 철도엔지니어 군단(Корпус инженеров путей сообщения)
- 러시아 제국 해군[17] (РИФ)
- 러시아 제국 흑해 함대
- 러시아 제국 발트 함대
- 러시아 제국 태평양 함대
- 러시아 제국 카스피해 소함대
- 러시아 제국 해병대(Морская пехота)
- 러시아 제국 공군(РИВВФ)
- 러시아 제국의 자제군대
- 폴란드 입헌왕국 왕국군(1814년 ~ 1831년) : 러시아 황제가 동군연합을 겸한 폴란드 입헌왕국의 자체적인 군대로 상당한 전력을 보유했지만 1830년 폴란드인들이 러시아에 대항해 일으킨 11월 봉기에 이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봉기 진압 후 러시아 당국이 보복으로 해체시켜버렸다.
- 핀란드 대공국 대공국군(1878년 ~ 1901년) : 이 군대는 러시아 제국 자치국인 핀란드 대공국의 자치군대이며 1878년 군사개혁이후에 형성되었다. 이 군대는 핀란드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핀란드인으로 구성되었고 최고사령관은 러시아 제국의 황제이며, 군대의 지휘관은 핀란드 총독이 가진다. 규모는 5600명, 8개의 소총대대, 1개의 기병연대, 포병은 없었다. 후에 1901년 새로운 병역헌장이 승인된후 해체되기 시작해서 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주둔지: 헬싱키)가 마지막으로 해체(1905년)되었다.
6. 국가
6.1. 〈승리의 천둥이여, 울려라!〉
1833년까지 불려진 비공식 국가이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가브릴 데르자빈(Гавриил Романович Державин, 1743년 7월 14일 ~ 1816년 7월 20일)이 작사했으며 오시프 코즐롭스키(Осип Антонович Козловский, 1757년 ~ 1831년 3월 11일)가 작곡했다. 러시아 장군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즈마일 요새를 점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노래이다. 1833년에 공식 국가의 등장으로 대체되었다.
6.2. 〈러시아인의 기도〉
실제로 1815년 버전의 멜로디는 영국 국가를 차용했다. 러시아의 몇몇 학자들은 작곡가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는 하는데 솔직히 너무 비슷하다. 작사가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인 바실리 주콥스키(Василий Андреевич Жуковский, 1783년 2월 9일 ~ 1852년 4월 24일)이다.
러시아에서 국가(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гимн)라고 불릴 만한 노래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15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때는 알렉산드르 1세가 제위에 있었으며 나폴레옹의 침략을 막아낸 조국전쟁과 같은 큰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때문에 자연스레 차르를 중심으로 한 애국적인 가사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6.3. 〈하느님, 차르를 보호하소서!〉
바실리 주콥스키가 작사했고 알렉세이 리보프(Алексей Фёдорович Львов, 1798년 6월 5일 ~ 1870년 12월 28일)가 작곡했다. 주콥스키는 상기한 〈러시아인의 기도〉를 작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1905년 피의 일요일에 황제의 겨울 궁전을 향해 이콘을 들고 행진했던 시민들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이 곡이며, 1917년 혁명에 의해 제정이 무너지기 전까지 러시아의 국가로 불렸다. 그 후 소련은 〈인터내셔널가〉를 1944년까지 사용하다가 〈소련 국가〉로 그 국가를 바꾸게 된다. 영화 〈북경의 55일〉에서도 등장한다. #
7. 역대 황제 명단
8. 대중매체에서의 러시아 제국
- 이지테크의 유럽전쟁에서도 러시아 제국은 나온다. 어마무시한 영토를 자랑해 난이도는 매우 쉬운편
9. 관련 문서
[1] 아래는 로마노프 왕조의 깃발.[참고] 진한 초록색은 러시아 본토와 그 식민지, 연한 초록색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미치던 지역이다.[템플릿이미지출처] #, #, #[2]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남동생,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이었다.[3] 사실 영국도 러시아와 비슷하게 변두리에 있고 수비하기가 유리한 지형이어서 프랑스나 독일 등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에서 강력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19C–20C에 걸쳐 가장 강한 대립각을 형성한다. 또한 일본도 이런 좋은 조건이 다 갖춰져서 도움이 됐다고 평가된다.[4] 사실 러시아의 승전은 그 국력에 기반했다기보다는 청야전에 초월적으로 유리한 지리 환경, 프랑스의 답없이 길어진 보급선 등이 일조한 결과로 보는 편이 맞다. 러시아 군사력의 실체는 크림 전쟁에서 드러난다.[5] 물론 나폴레옹이 탈출하여 백일간 난동을 부리긴 했다.[6] 알래스카가 빠진 1914년 당시의 국경으로도 핀란드와 폴란드 때문에 1945년 이후의 소련 영토보다 조금 더 크다.[7] 이 당시 영국은 수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다만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19~20세기 전반의 일이며(20세기 전중기에 캐나다와 호주는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거의 독립국급의 자치권을 획득) 러시아가 훨씬 넓었던 기간이 더 길다. 러시아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의 일이고, 영국이 캐나다, 호주, 인도를 웬만큼 식민화한 것은 19세기 전중반의 일이다.[8] 제정 러시아는 지금의 러시아 연방보다 '''인도 2개''' 면적만큼 더 컸다.[9] 이 부분은 약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은 당시 하와이 제도 내부에서 다른 섬의 부족장들끼리 권력 다툼이 일어나던 와중에 오늘날 하와이 제도 서북부 카우아이 섬의 부족장인 카우무알리가 하와이 섬의 부족장인 카메하메하 1세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의 힘을 빌리려 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링크된 주소를 참조.#[10] 언어를 기준으로 분류함[11] 편의상 몽골계 칼미크인 등 포함[12] 통계 원문에는 모어가 이디시어인 경우[13] 사모기티아인은 별도로 통계냄[14] 우룸인[15] 베사라비아 일대에 이주한 불가리아인 난민 후손[16] 타타르족으로 분류됨.[17] 러시아 제국 당시에는 북방함대는 없었고, 1693년 7월 표트르 1세가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곳을 방문하여 아르한겔스크에 대규모 조선소를 건설했으며, 481척을 건조했다, [18] 현대 러시아어 표기는 ''Молитва русских''.